호수 너머 숲에는 요정이 산다.
미스틸테인은 그 소문을 충분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여겼다. 요정은 겁이 많고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장난기가 넘쳐 일부러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놀기도 한다. 백 년에 한 번 골려주기만 해도 설화가 만들어지기엔 충분하겠지. 이브에게 요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눈을 빛냈다. 자신이 곁에 있는 한 허튼 짓은 못 할 테니,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를 건너기로 했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널따란 호수를 빙 돌아 걸었다. 마른 나뭇잎과 가지를 밟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물 위에 느긋이 앉아 흐르는 푸른 오리나 허리께 높이까지 튀어 오르는 은빛 물고기를 마주한 이브는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기록하며 걸었다. 그러다 보니 걸음은 점점 느려져, 아예 주저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처음 보는 꽃의 이름을 추측하는 놀이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해가 다 졌다.
밤의 숲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어둠은 달을 추대해 무수한 비밀을 감추고 미지의 매혹으로 방문자를 초대한다. 두 사람은 기꺼이 그 올가미에 발을 들였다. 미스틸테인이 마법으로 희미하게 빛을 밝히자 길을 알아보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열에 이끌린 곤충 여럿이 모여들었다. 둘은 아랑곳 않은 채 여섯 개의 다리를 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도중, 문득 미스틸테인이 생각했다.
‘너무 조용하군.’
그는 당연히도 환상이라 불리는 것들의 기척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요정의 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고요했다.
‘나를 알아보았을 수도 있겠어.’
정말 그렇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블랙드래곤의 악명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에게도 파다했다. 어쩌면 용의 분노를 샀다며 지레 겁을 먹고 소란을 부릴 수도 있을 테다. 이쪽에서 먼저 부르면 역효과일까? 생각이 가지를 뻗던 도중, 그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이브가 없었다.
미스틸테인은 아연히 발을 멈추었다.
이브는 어느 순간부터 미스틸테인이 밝혀주던 빛이 꺼져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도중에 길이 엇갈린 듯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잃었을 땐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어련히 그가 찾아와 줄 테니 혼란에 빠질 이유도 없다. 소리를 질러볼까 하다가, 괜히 위험한 무언가를 불러들일 가능성이 떠올라 관두었다.
내내 걸었더니 다리에 피로가 쌓여 굵은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광원이 사라지니 이제는 풀벌레 우는소리도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 수목이 우거져 달빛조차 새어들기 힘드니 한 치 앞조차 캄캄했다.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소리가 울렸다.
넌 누구야?
모르는 목소리였다. 아이 같기도, 노인 같기도 해 기묘한 데다 들려오는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다시 소리가 울렸다.
넌 누구야?
이브는 대답해야 할지, 그러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미스틸테인이 있었다면 조언을 구했을 테지만 지금은 혼자뿐이었다. 그를 떠올리자, 문득 이브는 무엇도 두렵지 않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에블린 베텔게우스.”
그것, 혹은 그것들이 되물었다.
넌 누구야?
이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지 않은 대답이었던가? 허나 이름 외에 무엇을 소개하면 된다는 말일까. 그는 요정도, 드래곤도 아닌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여행자로서 채비하는 삶에 사소한 짐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니 이름과 연인 외에는 무엇도 가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어둠 사이로 두 인영이 보였다. 마치 그 형태만 빛을 가져 그림자를 몰아내듯 선명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브는 눈을 돌리지 않고 바라보다 마침내 깨달았다.
꿈에서 본 장면과 같다.
새하얀 미스틸테인이 자신을 피해 뒷걸음질 치고, 신경질적으로 무어라 소리친다. 그 말까지 들리지는 않지만 공포에 질려 있음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자신은 분노한 표정으로 그를 몰아붙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광경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미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이 다시 물었다.
넌 누구야?
이번에 이브는 답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일생이 사방의 잎과 가지 사이에 산산히 흩뿌려져 산재되어 있었다. 그중 무엇도 자신이라 확신할 수 없었고, 타인이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 그렇게 하면 선택받지 못해 소외된 모든 기억이 영영 손아귀를 떠날 것만 같다는 모순이 한 켠에 자리 잡았다.
그는 숲에 입장한 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도 사람을 무섭게 했다.
선택해야 해. 무엇도 갖지 않은 채 혼곤한 삶을 헤쳐나갈 순 없으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그것들인지, 스스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나. 단 한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갈급히 뻗은 손끝에 온도가 닿았다.
“이브.”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이브의 앞에 선 사람은 미스틸테인이었다. 빛을 띄우고 있지 않았지만 이브는 생생히 그를 목격했다. 강하게 손에 힘을 주자 그는 놀라지도 않고 맞잡아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모든 환영이 사라졌다. 숲은 다시 검어졌다. 똑같이 검었지만 이브는 그와 어둠을 분간할 수 있었다.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목소리도 잦아들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미스틸테인이 두리번거렸다.
“요정이 장난을 쳤군요.”
“그게 요정이었나요.”
“무엇을 봤습니까?”
“.......”
이브는 침묵했다. 꺼려져서가 아닌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난항을 겪어서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혼란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정말 상관없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미스틸테인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어느샌가 그가 다시 불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저번의 스노우 브릿지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화내지 않는군요.”
“그야….”
저번의 그가 화를 냈던 이유는 자신이 상처를 입어서였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스틸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욕구는 있지만 자아는 없습니다. 동물처럼. 그런 존재에게 화를 내봤자 소용없겠죠.”
이브가 눈에 이채를 띄웠다. ‘그랬군.’
“저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으니 크게 해를 끼칠 마음도 없었을 겁니다. 호기심이 들었을진 몰라도.”
“호기심이라.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네요.”
“역시 무언가 있었군요.”
“글쎄요.”
그는 말끝을 흐렸다. 꿈을 꿨을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장난기가 들어서였다. 요정에게 옮았나 보다. 이브가 작게 웃었다.
“스스로 떠올려 보세요.”
미스틸테인이 그날과 같이 곤혹을 표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그가 할 말을 잃었을 때에 변명처럼 내뱉는 문장이었다. 듣기에 나쁘지 않아 지적한 적은 없었다.
둘은 다시 야음을 지났다. 이따금 반딧불이와 같은 빛무리가 시야 한구석에 날아들었지만 이브는 부러 모른 척했다. 그들이 원하는 반응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대갚음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아닌 척 눈길을 돌리며 희미한 빛 덩이를 눈에 새겼다. 숲을 빠져나가면 그려볼 심산이었다.
호수 너머 숲에는 요정이 산다. 요정은 여행자의 마음을 떠보지만 어떠한 의도도 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에 드는 인간은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답을 찾으려 스스로의 내면을 헤집는다.
그러나 이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5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단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을 선택할 따름이야.
그리고 그 또한 같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리 내어 말하기는 잠시 유보해두었다. 답지 않게 상황이나 분위기를 따져보고 싶었다. 가장 어울리는 때에, 부드럽고 반짝이는 요정의 날개로 감싸 조심스레 건네고 싶었다. 모양내고 닦아낸 마음을 마주하고 환하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숲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떨어진 여러 줄기의 달빛을 한 발씩 짚어가며 향했다.
미스틸테인이 그 모습을 보고 옅게 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