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하게 됐군요.”
“무슨 일이죠?”
“스노우 브릿지가 무너졌습니다.”
두 사람은 북부의 빙하 지대를 건너고 있었다. 그곳은 뮈르크비드보다 훨씬 혹독한 기후의 설원이어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누군가 왜 이런 삭막하고 지독한 곳으로 왔느냐 묻는다면,
딱히 이유는 없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고 길이 이 땅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브는 당연히 미지의 장소로 향하고 싶어 했고, 위험한 모험에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던 미스틸테인도 북부의 땅에는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냉기와 얼음은 그의 권속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브를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한 가지 계산을 착오한 점이 있다면, 그 오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으면 그는 본모습을 내보일 수 없다. 즉 힘을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고, 유사시에 최선의 수를 쓰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검은 용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한 번이라도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다. 그래서 미스틸테인은 내내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부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에겐 요람과도 같은 눈더미가 금세 이브에게 덮쳐 올 눈사태로 보이고, 거대한 얼음 바위는 당장이라도 깨져 고드름의 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보다 못한 이브가 “눈과 싸우려 들지 마세요.” 라고 했지만 미스틸테인은 “제가 이깁니다.” 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다. 이브는 그 말이 정말이지 재미있어서 이곳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해버렸다. 살을 에는 추위도 숲을 떠올리게 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다시 처음이다. 스노우 브릿지가 무너졌다. 그건 이 지역에서 크레바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뜻했는데, 인간의 힘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자연의 조각품이었다. 그 세월을 버틴 다리가 하필 지금에서야 무너지다니 기적적인 불운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주변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술렁였다.
다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우리는 저곳을 건너 식량을 조달해와야 하는데, 이대로 마을 째로 조난된 건가?
누군가 다리를 부순 거 아니야?
잠깐, 저기 이방인이 있어.
정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야.
순식간에 수 십의 눈길이 두 사람을 향했다. 이브는 담담히 그들을 마주보았고, 미스틸테인은 더욱 곤란해졌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말주변이 없고 변명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이 별다른 말이 없자 의혹은 한데 모여 눈덩이처럼 뭉쳐지곤 무리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시작한 곳으로 돌아왔을 때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몸을 불린 후였다. 그것으로 눈사람이라도 만들려면 그야말로 용의 발이 필요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눈덩이가 뒤에서 덮쳐오는 것마냥 날뛰었다.
“설명해! 너희들이 한 짓이냐!”
이브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미스틸테인도 이어 말했다.
“웃기는군.”
당연히 사태는 눈사태만큼 심각해졌다.
폐쇄된 마을은 그들끼리의 결속이 강하다. 결코 외부인에게 다정하지 않고,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관습은 살아남기 위한 방식임을 둘 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말을 섞을 가치가 없군요. 가죠. 우회하면 어디든 길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미스틸테인은 그 이상 화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이브도 묵묵히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발자국 네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이브는 이마에 짧게 달리는 고통과 함께 피가 맺혔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한 장신의 청년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순간 이브는 얼른 미스틸테인을 돌아보았고, 그의 눈길 또한 청년에게 꽂혀 있음을 깨달았다. 얼버무리기엔 이미 늦었다.
“돌아와! 다리를 고쳐내!”
미스틸테인이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브가 그를 잡아야 하는지, 섣불리 나서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라.”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나오라고 하지 않았나. 거기, 너.”
미스틸테인이 정확히 청년을 삿대질했다. 청년은 발이 땅에 붙은 채 걸음을 떼지 못했다. 무척 두려운 기분이 들었는데, 자신이 무엇때문에 두려워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질렸다는 얼굴로 부서진 다리 쪽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공중에서 대기가 얼어붙어 저들끼리 엉기기 시작했다. 결정은 바위가 되었고, 바위는 빙벽이 되었다. 크레바스가 순식간에 이어졌다. 끝없는 계곡은 다시 단단한 길로 이어졌다. 수천 년의 시간이 손짓 한 번으로 되감겼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렸던 청년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움켜잡고 새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눈밭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살짝 아연한 얼굴로 미스틸테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평소 속내를 알기 쉬운 사람인데도, 이럴 때만은 그 영혼이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앉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미스틸테인이 청년에게로 다가가 팔을 잡고 일으켰다. 제법 교양 있는 손길이었지만 그는 무력히 울음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며 흐느꼈다. 마치 연행하는 듯한 기묘한 자세로 두 사람이 다리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그가 청년을 한가운데에 세웠다. 그리곤 혼자 돌아왔다.
그가 다리를 벗어나는 마지막 걸음에, 바늘 같은 실금이 스노우 브릿지의 가장자리에 새겨졌다. 오로지 청년만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미스틸테인이 이브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곤 뒤늦게 미간을 좁혔다.
“미안합니다.”
“뭐가 말이죠.”
“다쳤잖아요. 두고 가서 미안해요.”
그저 약간 스친 상처였다. 피는 진즉 멎었고, 앞머리를 걷지 않으면 상처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이브는 ‘별 것 아니다’ 라고 말하진 않았다.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 앞에서는 의미 없는 말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자.
“괜찮아요.”
이브가 웃었다. 미스틸테인은 불편한 기색으로 안도했다. 이제는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보다, 방금 뭘 한 거죠.”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왜요?”
“…….”
미스틸테인이 잠시 침묵하며 사람들을 일별했다. 패닉에 빠진 청년은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아까보단 덜 하지만 청년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 자릴 떠나지도 못했다. 그제야 이브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달았다.
“불안해하고 있군요.”
“적어도 수 십 년은 불안해하겠죠.”
“다리가 무너질까 봐.”
“대가 없는 기적은 없으니까요.”
전설의 마법사, 재앙의 용, 못된 요정.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그들은 그를 화나게 했고 그는 균열 위에 불분명한 희망을 남겼다. 마을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마법의 흔적을 결코 기쁜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랜 저주가 아닐지 의심하며 드나들 때마다 가슴을 졸일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아요.”
의미 없는 담화였다. 미스틸테인은 후회하지 않았고, 이브는 그의 감정을 이해는 못해도 납득했다. 한 편으로는 인간들을 무감히 해치지 않았음에 감사하기도 했다. 오히려 다리는 그들에게 큰 도움이었다. 저대로 사라진 채라면 마을은 서서히 무너졌을 테니까.
미스틸테인의 빛 들지 않는 눈은 한없이 깊었다. 그가 이브는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세월을 살아와서도 있을 테고, 이제는 구분하기 힘들 만큼의 수많은 마음의 타래가 얽혀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을 싫어했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 또한 인간이었다.
그의 뒤로 깊고 어두운 얼음 계곡의 낭떠러지가 있었다. 어둠이 이어져 끝을 알 수 없이 밑으로, 밑으로 떨어졌다. 언젠가 보았던 검은 용의 광막한 눈동자 두 쌍이 아래에 도사린 듯했다.
이브는 시선을 떼고 인간의 모습을 갖춘 용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렇듯, 그 또한 예전과 다르다. 그곳엔 이제 절벽의 암흑과 같은 공허가 없고, 똑바로 마주 보는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게 무상히 마음에 들어 웃었다.
“저희도 건너려면 저 사람을 지나쳐야겠네요.”
미스틸테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 생각을 못 했군요.”
“의외로 즉흥적인 부분이 있어요, 당신.”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앞에서만 그래요.’ 말하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을 잇는 대신 두 사람은 손을 잡고는 넓은 다리를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숨죽였고 청년은 바닥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한 사람과 한 용이 크레바스를 모두 지날 때까지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점차 눈안개에 묻혀 희미해졌다.
불길한 검은 마법사와 그의 연인에 대한 전설이 마을에 남아 구전된다. 아이들은 이제 그들의 윗세대와는 다른 관습을 배운다.
‘바깥사람들에겐 친절해야 해.’
‘늘 검은 마법사가 우리를 시험하려 든단다.’
‘소홀히 대하면, 저 깊은 계곡에 떨어트려버릴지도 몰라.’
구멍은 그저 구멍일 뿐이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 크레바스는 앞으로 수 천년을 더 뚫려 있을 테다. 그러나 이어진 다리 또한 수 천년을 버틴다.
설원 한 가운데, 증오와 애정의 틈새. 두 사람의 이야기와 같이 기묘한 기적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