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맺어지기 직전 즈음의 이야기.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이즐린. 막막한 마음에 베나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눈이 오겠군요.”

 

이즐린은 식기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창을 닫는 베나를 돌아본다. 잔에 입혀진 금박의 온도가 손끝으로 유난히 차게 달라붙는다.

 

“감기에 들지도 모르니 내일 밤은 나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재차 묻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베나의 시선을 따라 빛이 수북한 하늘을 응시한다. 검은 장막을 눈꺼풀로 유심히 들춰보아도 무언가 쏟아져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이즐린은 베나에게서 세헤라자데의 일면을 엿본다. 둘은 척 보기엔 판이했으나, 불시에 사람을 곤란케 하고서 부지한 낯을 지을 때는 영락없는 혈육이다.

베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얇고 긴 천이 스치며 바스락댄다. 이즐린이 따라 일어서자 옷자락의 공단이 고요히 물결친다. 신관복은 무늬와 장식이 드물어 움직임에 기척이 적다.

 

“잘 마셨어요. 솜씨가 좋군요.”

“찻잎을 선물해 준 건 당신인걸요. 어디서 구한 건가요?”

“직접 기르고 있습니다. 조그맣게.”

 

이즐린이 짐짓 놀란 듯 입가에 손을 올린다. 여전히 그의 몸짓에는 연극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시간 때우기로도, 이렇게 생색을 내는 쪽으로도 쓸모가 있어서요.”

“또 그런 점은 그 사람과 다르군요.”

“그 애는 무언가 기르는 걸 싫어합니까?”

“잘 아시네요.”

 

이유를 되묻지는 않는다. 문간에 걸터 선 베나가 빙긋 웃자 이즐린이 자못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아직 어려서 그렇죠.”

“어머.”

 

이즐린은 무척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들썩인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농담은 아닙니다. 베나가 문고리를 돌리자 찬바람이 재차 방으로 새어든다. 그가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딜 수록 어둠과 뒤섞여 인영을 구분하기 어렵다. 경첩이 삐걱대며 까딱인다. 이즐린은 문을 닫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서 떠난 이의 말을 떠올려본다. 그토록 바라던 답을 구했는데도 어딘가 초초하다.

세헤라자데를 반추하는 이즐린은 유적 깊은 곳 미궁을 맞닥뜨린 모험가다. 한 번의 실수가 자신을 낭떠러지로 내몰고 그를 파헤칠 자격을 박탈하리라는 불안이 엄습한다. 여지껏 미지를 쾌락이라 여긴 적은 없었으나 오로지 그만이 다르다.

 

싸늘한 기운이 몸을 타고 오른 후에야 마저 문을 닫는다. 눈도 오지 않았는데 감기에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이부자리를 가다듬는다.

 

이튿날. 여느 때와 같이 이르게 눈을 떠 기도를 올리고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정무에 몰두한다. 오후부터는 좀처럼 틈이 없어 날이 저물 때까지 의자에 붙박인다. 펜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굽어보던 짙푸른 밤이 차디찬 숨을 내쉰다. 사막의 모야는 본디 사시사철 겨울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하다. 쿵. 그때 갑자기 창이 들썩이며 인영이 아른거린다. 소스라친 이즐린이 얼른 뒤로 물러나자 나뭇살로 된 창문이 삐걱 열리며 괴한이 들이닥친다. 대수롭잖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손길이 익숙하다. 이즐린은 얼빠진 목소리로(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그랬다) 이름을 부른다.

 

“세헤라자데?”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군.”

“…놀랐잖아요.”

 

큰 소리가 나오려 해 겨우 눌러 낮춘다. 세헤라자데는 대신관의 집무실을 제 집 안방마냥 무료한 듯 둘러보다 눈을 마주쳐온다. 금빛 시선은 일렁이는 촛불 한 줄기를 머금어 유별히 돋보인다.

 

“지금 시간 있나?”

“갑작스럽네요.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급하지는 않지만.”

 

짐짓 새침한 대꾸에 세헤라자데는 선뜻 손을 내민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

 

그러면 이즐린은 응당 거절할 수 없다. 못 이기는 척 나릿나릿 손을 겹치자 그가 단단히 감싸 쥔다. 귀부인을 모시듯 정중히 이끄는 태도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같은 의문 따위는 안중에도 남지 않는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신전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다. 세헤라자데가 무언갈 중얼대곤 제 겉옷을 벗어 이즐린에게 덮어씌운다. 그러자 난롯가에 둘러앉은 듯 아늑한 기운이 금방 몸을 녹인다. 얇은 천 한두 장을 걸치고도 추운 기색이 없어 보이는 그가 말한다.

 

“눈이 올 거야.”

 

기시감을 느낀 이즐린이 그를 올려다본다.

 

“베나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러자 세헤라자데는 눈꺼풀을 몇 번 여닫다 이내 눈꼬리를 가늘게 접는다. 모호한 낯에 이즐린은 이유 모를 조급함을 되새긴다.

 

“내 기억에, 마지막으로 눈이 왔던 게 백여 년쯤 전이군.”

“당신이 백 년이라고 할 정도면, 이백 년 가까이 되었을 수도 있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왜 날 데려왔죠?”

 

세헤라자데가 낮게 웃자 이즐린은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묻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당연한 일을 묻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눈을 보여주려고.”

 

이즐린은 정확히 반대로 이르던 베나의 말을 떠올린다. 이상 기후에 몸을 망칠까 걱정되어 외출을 자제하라 하였으나, 그는 지금 세헤라자데와 함께 백 년 만의 눈을 첫 번째로 환영하기 위해 서 있다. 춥기는커녕 나눠 받은 체온에 마음 깊숙한 곳마저 녹아내린다.

 

“눈을 좋아하나요?”

“별로.”

“그런데 왜 보여주려 해요?”

“자네는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장관인가요?”

“나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리 말하더군.”

 

세 가지 질답이 지나도 눈이 올 기미는 없다. 찰나, 이즐린은 이대로 내리지 않길 바라고 만다. 보지 못하는 신에게 묵상하고 알지 못하는 이웃을 굽어보는 세상살이가 권태로웠다. 둘의 예상이 우연찮게 빗나가면 언제까지고 오지 않을 이를 기다리며 손을 이은 채 넓은 공허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다. 하염없이, 하릴없이. 세헤라자데가 고한다.

 

“고개를 들게.”

 

그래서 이즐린은 고개를 든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도, 명을 다한 별도 아닌 방문자들이 손을 흔들며 시야 가득 희부옇게 날린다. 마주 인사하듯 팔을 들면 금세 손바닥 위로 작은 둔덕이 쌓인다. 살살 쓰다듬자 금세 녹을 줄 알았으나 바스스 흩어져 내린다. 눈송이가 눈꺼풀을 스쳐 깜빡이니 세헤라자데가 보인다. 순간 맹렬한 충동이 그를 차게 식힌다.

 

“세헤라자데.”

“그래, 타틴.”

“나를 원하나요?”

 

세헤라자데는 놀라지도 않고 되묻는다.

 

“왜 그런 걸 묻지.”

“그냥 대답해 줘요.”

 

갑작스런 물음은 베나가 이즐린에게 먼저 일러준 명제였다. “그는 당신을 원해요.” 감정이 아니라 필요에 관해 논하는 기묘한 말이 도리어 이즐린을 안달 나게 했다. 그 문장에 다른 누구도 아닌 세헤라자데가 마침표를 찍어주길 바랐다.

눈발이 점차 거세져 상대의 표정을 살피기가 곤란해진다. 그래도 이즐린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좀체 펜을 들지 않는 수취인을 응시한다.

 

타틴 이즐린을 반추하는 세헤라자데는 유적 깊은 곳에 파묻힌 고대의 미라다. 오래간 바스러지지 못한 채 누구라도 이 지겨운 삶을 끝내주길 바라지만, 무거운 몸을 들쳐매고 조곤조곤 말 걸어주는 이를 보면 땅 위의 세상을 꿈꾸고 만다. 하지만 내 썩은 몸이 너까지 병들게 하면 어떻게 해? 그런 탄식조차 사치로 여겨 입을 다물고 사해에 몸을 맡긴 모래처럼 흘러만 간다. 여지껏 기지(旣知)를 안녕이라 여긴 적은 없었으나 오로지 그만이 다르다.

순간 서느러운 충동이 그에게 불을 지핀다.

 

세헤라자데는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당긴다. 온통 시야가 희어 이즐린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나 오히려 낫다.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자 두 사람의 입술 새로 눈송이 하나가 녹아간다. 세헤라자데는 맞닿은 살을 떼어내지 않은 채 말한다.

 

“답할 수 없네. 아직은….”

 

이즐린은 이미 그 입술로 답을 들었다.

 

“야속한 사람.”

 

정말이지 야속하고 서투른 사람. 어느새 그는 웃음을 터뜨린다. 흰 입김이 퍼져 나오자 세헤라자데가 안심한 듯 따라 미소한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고 풍경을 돌아보면 어느새 사막은 설원이다. 하룻밤이면 사라질 신기루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말하고, 걷고, 웃는다.

 

“눈밭에 서 있으니 도통 구별이 힘들군.”

“마음먹고 숨어볼까요?”

“소용없을걸.”

 

그 말은 꼭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내겠다는 선포여서 이즐린은 또 웃고 만다.

 

무엇도 영원할 수 없음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으나 지금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기꺼이 어리석어지길 택하는 마음이 같다.

누군가가 막연히 읊조린다.

 

아무래도 사랑이야.

 

 

 

 

 


 

 

 

 

 

작가의 말

 

세헤라자데는 이즐린의 미지이고, 이즐린은 세헤라자데의 기지입니다.

 

이즐린은 세헤라자데 같은 사람을 난생처음 보지만, 세헤라자데에게 이즐린처럼 평범한 인간은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즐린은 낯설다고 여긴 이에게 익숙한 인간미를 느끼고, 세헤라자데는 이즐린에게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받지요. 시작점은 달랐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알아갑니다. 앎은 곧 삶이고, 삶을 잇는 것은 사랑이죠.

각기 다른 이유로 자신의 손이 텅 비어있다 여긴 두 사람은 이제 절대 놓지 못할 인연이 생겼습니다. 삶의 무게가 두 사람을 사막의 땅에 굳건히 발붙이게 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