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네.”
두 사람에게 호칭은 일종의 신호가 된지 오래다. 친분과 직위를 분리하고 두 가지를 다르게 취급해야만 비로소 제각기 공무가 성립되었다. 그들에겐 십 년 가까이 얽힌 매듭이 손가락 마디마다 묶여 있었다. 풀지 못한 채로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맞잡는 일조차 힘겨웠다.
그리고 아카네는 무엇이 초조한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운자 대장.”
사란의 발이 멈췄다.
“급한 건이 아니라면 차후로 미루죠.”
그가 대답 않고 시선을 내려 아카네를 바라보았다. 늘 상대를 올곧게 직시하던 총사령관은 무엇이 불안한지 깊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근래 신경 쓸 일이 많아서요. 그럼 다음에.”
“...네, 가보겠습니다.”
대답과 달리 사란은 떠나지 않고 먼저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간 서 있었다. 세 걸음만 더 나아가는 생각을 해본다. 무작정 잡아 세우고 말한다. “왜 그런 걸 아직까지 듣고 있는 거야.” 작은 어깨는 한 손에 들어오고 아카네는 사란의 힘을 뿌리칠 수 없다. “나를 봐.” 어느 쪽이고 울 듯한 얼굴을 한다. 실제로는 수 년 간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이젠 의지할 수 없니.” 네 가족을 대신할 수 없어서? 이어지는 말은 상상 속에서도 내뱉을 수 없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신기루가 흩어지자 아카네는 이미 떠나고 없다.
사란은 제 손발에 묶여 있는 매듭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실끝이 아카네와, 슌지와,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면 더는 풀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마저 놓아버리면 과거의 유대와 향수를 느낄 자격을 박탈당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카네는 이런 족쇄 따위가 없어도 모두의 중심이었다. 한 번만 멈춰 선다면, 한 번만 돌아본다면 깨닫게 될 테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러지 않는다. 외줄 타는 자에게 고개 돌려 뒤를 보는 일은 크나큰 사치였기에.
누군가에게 보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사란이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미 많은 것들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제 사흘 정도는 소강상태일 것 같군요.”
“하포크라테스 측과의 대화도 한차례 마무리 되었으니, 이젠 합의점을 조절해나가는 단계고요. 서로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겠죠.”
“드디어 외무부서도 한숨 돌리겠습니다.”
“정말로요~ 오랜만에 기분 좋게 바빠 보네요.”
운자 사란, 와타나베 카케루, 아오야마 노부오, 하나자와 마유가 차례로 말했다. 누군가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자 누군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앉아 있던 시간이 한참이라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두 번 두드려졌다. 정갈한 리듬을 듣고 자리의 모두가 문 너머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시간 맞춰 끝났군.”
임시 총사령관, 세키가하라 란이 문을 젖히고 모두를 돌아보자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인사했다. 카케루는 멋쩍게 웃었다.
“요즘은 조금이라도 일정이 밀리면 큰일이니까요.”
“복귀한 대원들을 포함한 차주 임무 재배치에 손이 필요하다. 확인만 하면 돼.”
“지금 갈게요.”
여러분은 쉬고 계세요. 카케루는 지치지도 않는지 종종걸음으로 란을 따라 나갔다. 마찬가지로 피로보다 의욕을 돋보이던 마유는 누군가와 점심 약속이 있다며 해사한 웃음을 살며시 건네고 복도 저편으로 떠나갔다. 회의실에는 금방 두 사람만이 남았다.
“노부오 씨도 식사하셔야죠.”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인데, 같이 어떻습니까?”
“아, 저는.”
사란이 의자를 집어넣고 제 몫의 서류를 한데 모았다. 노부오는 회의실의 불을 껐다. 열린 문에서 쏟아지는 빛이 밝아 조도는 낮아졌지만 어둡지 않았다.
“아카네에게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런, 식사는요?”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르려고요.”
“아쉽네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물론이죠.”
노부오는 병문안에 대해 가타부타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걱정하고 그리워했는지, 목전에 닥친 일들에 집중하기 위해 얼마나 그 마음을 없는 셈 쳐왔는지. 사란은 수뇌부의 일원이 아니지만 이번 원정의 책임자였다. 또한 하포크라테스, 라이브스 측과 지구 원정대 대표로서 교류했기에 동맹 협의에도 그가 필요했다. 귀환 후 집에 돌아간 적이 있나 싶을 만큼 바삐 움직였으며 대원보다는 수뇌부와 마주하는 일이 더 잦았다.
그간 지구의 태양이 지평선 위로 약 730번 떠오르고 저물었다. 사란은 해변가에 서서 내내 일몰을 지켜보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놀랄 만큼 삶에 공백이 없었다. 가족, 친구, 지인들과의 멀어진 거리를 가늠하고 발을 구르며 제 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에게 일절 필요치 않았다. 노부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보다는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사란도 그에게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이대로 좋았다. 둘은 정오의 햇살이 눈가를 어루만지는 기분을 느꼈다. 창문이 없는데도 그랬다.
걸어 나오니 하늘은 의외로 흐렸다. 비가 오진 않을 듯했지만 볕이 내리쬐지는 못했다.
메이와 병원 근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두 개와 주스 하나를 사들고 문밖에서 금방 먹어치웠다. 빠르게 먹는 습관을 들인 건 군 시절이었지만 여태까지도 유용할 줄은 몰랐다. 식사를 마친 후 로비의 수속을 지나 병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층 오른 뒤 의사 한 명이 동승했다. 사란은 그 짧은 틈에도 핸드폰으로 업무를 확인하고 있었기에 옆 사람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네의 병실이 자리한 층에 도달해 사란이 먼저 내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초면에도 낯설지 않은 이와 마주했다. 좁혀지는 간격 새로 명찰이 보였다. 榊原 楪. 닮은 빛깔의 시선이 순간 맞닿음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그가 생각했다. '유즈'는 애칭이었군.
2년째 깨어나지 않았다던 아카네는 여전히 숨을 고르며 누워 있었다. 반가운 이를 마주해 기적처럼 눈 뜨는 일은 없었다. 머리는 자라지 않았다. 길면 치료에 불편점이 많기에 주기적으로 관리받는 거겠지. 살이 빠졌고 낯빛이 어두웠다. 사란은 의자를 끌고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아카네.”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아카네.”
미처 듣지 못한 사람을 부르듯 사란이 다시 한번 이름을 말했다. 당연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만이 자리했다. 그는 지난 9년, 혹은 11년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대화는 언제나 일방향이었고 아카네가 깨어 있어도 잠들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사란은 평소처럼 일과를 보냈다. 그저 장소가 병실이었다. 핸드폰과 패드를 이용해 업무를 보고, 음성 통화가 필요하면 짧게 진행하며 들고 온 서류를 작성하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의식불명인 환자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편의점에서 구매한 음료 세트를 나누곤, 자주 보게 될 테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했다. 회진 시간에는 아카네의 상태나 도시의 근황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종일 해가 질 때까지 병실에 있었다.
여느때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본부로 돌아가 오늘의 업무를 결산할 시간이 되어 짐을 챙겼다. 그리고 내내 그랬듯 아카네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사란은 우연히 기도하듯 겹쳐진 세 개의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네모난 창에 일몰이 내려앉고 있었다. 병실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풍경 속 아카네는 노을의 주인이었다. 그의 메마른 손등이 단 한 번 젖어들었다. 누군가 울고 있다. 아카네는 눈을 뜰 수 없기에 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운자 사란에게 죽음이란 유보였다. 홀로 설산에 올랐을 때도, 마하의 속도와 5만 피트 상공에 몸을 맡겼을 때도, 검은 우주에 올라 지구를 내려다보았을 때도 그래왔다. 보더는 그 연장선일 뿐이었다. 어떤 이에게 그는 걸출한 도전자였으며 어떤 이에게는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자였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간단히 흩어져버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도 더는 자신의 일로 누군가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9년 전부터 그는 친지와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새로운 사람을 결코 사귀지 않고 하나뿐인 가족과는 소원함을 유지했다. 어느날 곧장 세상에서 지워진다 하더라도 문제 없을 사람이 되어야 했다. 죽음이 예비된 채 모든 원정에 올랐으나 매번 살아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주어졌음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다녀왔다고 말하고 싶어.”
내게는 남은 것이 별로 없어. 네게도 그렇겠지.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을까. 이렇게나 쉬운데. 단지 하나의 선을 넘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사란이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면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얼굴이었다.
“잘 자. 내일 봐.”
어느새 황혼이었다. 구름이 개어 어두워질수록 하늘은 맑아졌다. 돌아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었다. 남동쪽에서 찾아온 때이른 계절이었다.
실례합니다~ 수뇌부 멋대로 가져다 써요. 오류가 있다면 너그러이 짚어주세요.
모두 열심히 일해서 지구의 미래를 발전시켜보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은 신의 어머니입니다. 거기서 일하신다고 하셔서 가는 김에.
이후 자캐는 가능하면 매일, 최소 매주 아카네의 병문안을 갑니다. 갈때마다 의료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건네기 때문에 병원 내에서 평판이 좋습니다. 업무나 병원 묘사는 부러 느슨하게 했으니 2D적 허용으로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