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한곡 반복을 추천합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일찍 왔네! 이리 와, 아빠가 한 번 안아보자.”
“….”
“살 빠진 것 같은데. 거기서도 식사 잘 챙겨 먹고 있는 거 맞지?”
“그럼. 내가 굶는 거 봤어?”
“후후, 그렇지.”
도진은 먼 도시의 무역 회사에 취직한 이후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귀환 시기를 짐작하기도 어렵기에 냉장고에 신선한 재료들이 남아있길 기도해야 한다. 아이가 부모님 집에 왔는데 밥도 안 먹이고 보낼 수는 없으니까. 나는 아이를 힘껏 껴안은 채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밥 먹고 가. 금방 차려줄게.”
“곧 일이 있어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응?”
“…알겠어.”
도진은 상냥한 아이다. 어릴 때는 말괄량이인데다 조심성이 없어 걱정했지만, 지금은 남을 배려하고 먼저 웃어주는 멋진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건강해 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다.
아이가 식탁에 앉자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바로 조리대 앞에 섰다. 타지에서 고생이 많을 테니, 어렸을 때 자주 해주던 가정식 위주로 만들기로 했다. 어제 마트에 다녀오길 잘했다. 해감해 둔 조개를 찌기 위해 프라이팬에 물을 채운다. 파와 생강을 섞어 향신료를 더하면 맛있는 찜이 완성될 거다. 끓는 동안 채소를 썰기로 했다. 분주하게 움직이자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도진은 나이를 먹을 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사회생활 때문에 지친 걸까. 자세히 묻고 싶지만 아이는 일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TV 보고 있어도 돼.”
“보고 싶은 거 있어?”
“뭐든 괜찮아. 엄마가 뉴스를 싫어하니 이참에 몰래 보는 건 어때?”
“하하.”
그러나 도진은 뉴스를 틀지 않았다. 채널을 돌리며 잠시 지방방송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쳤을 뿐이다. […되었던 대원들이 무사 복귀해….] 물이 끓는 소리와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돌아가던 채널은 다큐멘터리에서 멈췄다. 한 늑대 무리에 대한 관찰 일지였다.
[늑대들의 우두머리 선정 방식은 다른 종과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가장 강한 개체가 아닌, 가장 현명하고 경험이 많으며, 리더십이 뛰어난 개체가 맡습니다. 그리고 우두머리는 무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정찰 혹은 공격대의 선봉 등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습니다.]
우두머리가 길게 울부짖기 시작하자 다른 늑대들도 따라 하울링 했다. 그러자 밥솥도 소리를 내며 따라 울었다. 우연한 합창에 내가 조금 웃자 도진이 따라 웃었다.
있는 재료로 재빨리 준비하는 게 목표였기에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된장국과 새우튀김, 조개찜, 각종 채소 무침과 생강 절임. 반찬을 놓기 시작하자 도진이 수저를 놓아주었다.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같이 살아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자연스럽다.
“마침 해산물이 있어서 다행이다. 네가 좋아하는 새우도 있고.”
“고마워, 일부러 만들어주고.”
“많이 먹어.”
“응.”
요즘 어떻게 지내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일이 힘들지는 않느냐… 걱정되는 마음에 여러 가지를 묻자 도진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늘 같지 뭐. 내가 그래도 업무에서만큼은 누구한테 무시당하지 않아. 멋지지? 연애는 별로 관심 없어. 일이야 힘들수록 보람이 있으니까. 수저를 놀리며 이야기하느라 식사 속도가 느려졌다. 문득 생각했다. 일이 있다고 했는데 괜찮은 걸까.
“미안해, 아빠가 말이 너무 많지.”
“아냐,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갈 때 정류장까지 마중 나가줄게.”
“괜찮아. 밖에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도.”
“괜찮다니까. 이거 바삭하고 맛있다.”
“정말? 다행이다. 간장도 직접 만든 거 얻어온 거야.”
“어쩐지 맛이 깊더라.”
그러다 문득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다녀와.”
그가 자리를 비우자, 화장실 쪽에서 물을 크게 트는 소리가 났다. 얼마 후 그가 화장실 옆에 걸린 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나왔다.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아까 일 있다던 그거?”
“응, 오랜만인데 미안해.”
“괜찮아. 우리 딸 일이 제일 먼저지.”
도진이 제 몫의 식기를 정리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다 돌아보곤 웃는다.
“맛있었어. 고마워.”
“언제든 돌아와.”
“응.”
나는 기꺼이 마주 웃었다. 하룻밤도 보내지 않는 게 조금은 서운하지만, 영영 못 볼 것도 아닌 데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 테니 좋은 얼굴로 보내주고 싶었다. 문틈 새로 좁혀지는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내 문이 완전히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떠나도 괜찮아. 다만 돌아오렴. 언제나 내가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갑작스레 피부 위로 차가운 온도가 와닿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피자 어느새 먹구름이 몰려 있었다. 눈 깜짝할 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소나기였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란은 왼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두 시 반 가까이. 그러나 핸드폰을 들어 다시 확인해 보니 정오였다. 시계가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제아무리 우주 시계라도 시간을 뛰어넘으면 어쩔 수 없나 보다.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보니 일찍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 하얀 우산을 든 이와 마주쳤다. 그가 놀라며 사란에게 다가왔다.
“운자 씨, 왜 비를 맞고 계세요?”
“우산을 안 가져왔습니다.”
“씌워 드릴게요. 얼른 들어가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네?”
“제 시계가 고장 나서 시간을 헷갈렸어요. 지금 만나기로 했는데, 두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서.”
하루미 유우나가 당황하면서도 손을 높이 뻗어 사란의 머리에 우산을 드리웠다.
“에이지와 둘이 만나신 건가요?”
“네.”
“그럼 어떻게….”
“잘 안 됐어요. 미안합니다.”
“…….”
“2년 만에 만났는데, 마치 두 달 만인 것처럼 대하더군요.”
그가 애를 쓰자 사란이 자연스레 우산을 넘겨받아 유우나에게 씌워주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장대비 속에서 그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유우나가 고개를 숙였다.
“요즘 정말 괜찮았어요.”
사란이 따라 고개를 숙였지만, 훨씬 키가 작은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먼 곳을 보는 일도 줄어들고, 남들과 같이 평범한 날들을 보냈어요. 2년 동안… 거짓말처럼.”
그러다 문득 유우나가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아니,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운자 씨가 없어져서 좋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압니다.”
“저는 그냥….”
빗방울이 우산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유우나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사란이 빈손으로 유우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자, 그는 울음이 섞인 말을 부끄럼 없이 내뱉었다.
“저희 약혼했어요.”
사란이 시선을 돌려 그의 왼손 약지에 걸린 짙푸른 보석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언젠가 에이지가 사란에게 주었던 것과는 또 다른 생김새였다.
“축하드려요.”
“곧 결혼하기로 했어요.”
“…….”
“정말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이 계획해 둔 일정은, 셋이 함께 마주하고선 천천히 도진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주고 그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최근 에이지의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그러나 사란의 사소한 실수로 첫 단추가 단단히 잘못 끼워졌다.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유우나에게 무어라 말해야 위로가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2년이 두 사람에게는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해결책은 명확했다. 영영 그들의 삶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그 자신 또한 어쩔 수 없을 경우에 택할 최후의 선택지 중 하나로 여겼으나, 막상 유우나는 납득하지 않을 듯했다.
“일단은 추이를 더 지켜봅시다. 지금은 곤란하니.”
“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이어나가는 것만이 최선이라면 눈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사란도, 유우나도 평소 결코 그런 방식을 택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도 알려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에이지 자신조차도. 손목시계는 아직도 2시 22분이었다. 여전히 멈춰 있다. 누군가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에노하라의 보건실은 민간인 부상자로 이미 만원이어서, 사란은 악기를 한 쪽으로 몰아둔 작은 음악준비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의료진이 항시 붙어야 할 정도로 위급한 부상이 아닌지라 처치를 받고 회복할 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민간인 대피가 거의 완료되어 오늘이 지나면 미카게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때까지 최대한 무리하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오로지 달빛만이 그의 곁을 비출 때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루미 유우나였다.
“운자 씨!”
“하루미 씨.”
“다치셨다고 들어서, 괜찮으세요?”
상체에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는 사란을 본 유우나가 걱정스레 눈썹을 내렸다. 그를 올려다 본 사란이 무언갈 발견하곤 말했다.
“울고 계셨나요.”
“아….”
유우나의 눈두덩이 조금 부어 있었다. 그는 머쓱한 듯 웃지도, 쑥쓰러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시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네, 사실 전할 말도 있어요. 아프실 텐데, 이런 이야기는 죄송하지만….”
사란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감이 들었다.
“말씀하세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안색은 이 부근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도시 전체가 모두 그와 같았던 적이 있다. 그건,
“에이지가 사라졌어요.”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이다.
찰나 사란은 말문이 막혀 그대로 굳어 있었다. 호흡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숨조차 쉬지 않았다. 깊은 밤 속에 녹아드는 두 사람. 한참 동안의 침묵. 마침내 사란이 처음으로 꺼낸 한 마디.
“죄송합니다.”
그러자 유우나가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사과하지 마세요.”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저만은 당신에게 그래선 안 돼요….”
“하지만….”
“운자 씨 탓이 아니에요.”
잘 듣지 않으면 우는 건지,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통곡이 섞였다. 유우나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그냥 무서워요.”
“…….”
“에이지가 저를 두고 간 걸까 봐.”
언제나 우주 너머의 딸을 그리워하던 에이지. 납치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게이트를 넘어 기어코 그를 찾으러 간 거라면? 그렇다면 유우나는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돼버린다. 사란이 다친 몸을 일으켰다. 유우나는 우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천천히 유우나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비가 오던 그날과 같이.
“그것만은 아니에요.”
유우나가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지 않아요. 장담합니다.”
사란은 울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저는 에이지의 오랜 친구잖아요. 잘 알아요.”
유우나는 그 너머의 달빛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란은 십여 년 간 늘 해왔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그래야만 했다.
“반드시 되찾아 오겠습니다.”
한동안 그곳을 연주음이 아닌 울음소리가 가득 메웠다. 어쩌면 피난민이 있는 다른 교실에서도 같은 광경이 되풀이되고 있을 테다. 사란은 유우나의 등을 쓸어주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이제 되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 슌지와 아카네, 구 보더의 동료들, 사라진 사람들, 에이지가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우주는 너무나도 광활하며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저 스러져 갈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그의 시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언가를 해내야 했다. 그가 유우나에게 속삭였다. 결혼식 꼭 갈게요. 초대해주실 거죠? 괜찮아요, 요즘은 이 나이에도 몇 번 씩이나 결혼한다잖아요. 꼭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약속할게요.”
첫 장면은 지구로 귀환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두 번째 장면은 21일 새벽의 일입니다. 이 사이의 기간엔 일단 에이지 문제는 덮어둡니다.
에이지는 납치당했습니다. 저도 정말정말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 러닝 동안 준비해둔 여러가지 플랜이 세계의 거대한 흐름으로 와장창 되는 바람에 이런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아서…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늑대 얘기는 AU 성이 울프인 김에 끼워넣어 봤습니다. 노리고 쓴 건 아닌데 자캐랑 조금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신기하네요.
시즌 1 프로필에 적혀 있는 거지만, 자캐는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먹다가 못 참겠어서 화장실에서 게웁니다.
에이지가 말하는 '엄마'는 사란이 아닌 유우나입니다. 에이지-유우나-도진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캐하고 마주할 때만요. 역할극을 하는 것처럼.
에이지의 증상은 100% 어쩔 수 없는 질병이라기보단, 어느 정도는 자기 암시입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그런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것도 따지면 질환의 일종이긴 하지만 병명을 정한 적은 없습니다. 실제 병을 언급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언제나와 같이 단전에 사특한 기운이 쌓여 기혈이 막혔다고 아시면 됩니다(?) 외계 행성의 기운을 받아 트리온 기혈 뚫어올게요.(가능하다면)
예전 히코와 피아노 치는 로그에 사란과 에이지의 결혼 반지 보석이 푸른색이라고 언급되는데, 그건 하늘색에 가까운 맑고 밝은 색입니다. 하루미 유우나의 것은 짙푸른색이고요. 사란에게는 자기 눈색과 같은 반지를 주고, 유우나에겐 유우나의 눈색과 같은 반지를 준 겁니다.
여기서 에이지가 두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사소한 부분이라 못 알아보실 것 같아 부러 적어둬요.
자캐 인생이 자꾸 제가 예상한 방향보다 더 너무 심각해지는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무너지지 않을게요~ 아자~